전문가 기고

대한민국 의료기기 산업 발전을 위한 소고(小考)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교수 윤석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교수 윤석준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 분야를 접할 때마다 씁쓸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하면 요즈음 웬만한 분야가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는 반면에 아직도 대한민국 의료기기산업은 선두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문화 스포츠 분야를 살펴보자! 웬만한 세계프로골프대회에 대한민국 국적의 남녀 선수들이 선두권에 위치 해있다. 국가대표 축구 경기인 월드컵도 이제 아시아에서는 단연코 선두이며 세계무대에서도 16강 진출을 드물지 않게 해낸다. 영화 부문에서도 유럽의 베니스상을 넘어 그래미상과 아카데미상까지도 최우수상에 한국 영화가 위치하곤 한다. 산업 분야를 살펴보면 이미 대한민국의 삼성과 LG 제품이 전기·전자 분야에 있어 일본을 넘어선지는 오래이다. 자동차의 경우도 세계 10위권 안에 현대와 기아자동차가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국산 의료기기 분야는 아직도 중가(middle end)브랜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무슨 차이가 이토록 큰 장벽을 의료기기 분야에 남기고 있는 것일까?

제 어릴 적 기억에 국내 영화산업의 가장 큰 이슈는 헐리우드로 대표되는 선진국 제작 영화를 국내 개봉 극장에 일부만 상영하고 국산 영화를 일정 비율 상영토록 하는 ‘스크린 쿼터’ 제도였다. 물론 대중들의 관심은 故 강수연 배우를 비롯해 유명 영화배우들이 직접 스크린쿼터 사수 시위대열에 서 있다는 흥미로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무슨 내용인가 살펴보게 된 제 기억에 그 이슈는 낙후된 국내 영화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거대 자본을 가진 헐리우드 영화 상영 편수를 일정 비율로 제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자간무역협상 등의 중심에 서 있는 이슈라 당연히 갈등이 노정 되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영화인들과 정부의 노력이 보태진 결과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대한민국 영화산업은 지금 어떠한가? 세계 수준의 영화제작이 드물지 않게 대한민국 브랜드로 만들어지고 있지 않는가?

자동차 산업으로 넘어가 보자! 1980년대 포니 신화를 이끌었던 故 정주영 회장이 세계 수준의 자동차를 우리나라가 생산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을 때 우리 국민 가운데 과연 몇 %나 현실성이 있다고 믿었었는가?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브랜드가 세계시장을 누비고 있다. 이 일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장치산업의 대표적인 분야인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부의 전방위적인 노력이 199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일본산, 미국산 그리고 유럽산 자동차와 이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는 몇 년 전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단’이 대한민국의학한림원에 의뢰한 연구용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하면서 다수의 국내 의료기기 개발회사의 주역들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면담에 응했던 다수의 중요 인사들의 의견을 요약하면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었다.

첫째, 국내 대형종합병원에서 국산 의료기기를 구매해 사용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경영상의 이유 때문이라도 중저가 시장이 열리는 동남아시아 등 저개발국가가 주요한 판매처가 되고 있다는 점.

둘째, 현재의 기술력에 비해 식품의약품안전처·한국보건의료연구원·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이어지는 건강보험 등재 과정이 너무나 큰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두 번째 이유때문에 대형종합병원에서 구매를 꺼리게 되고 설령 건강보험에 등재되더라도 다국적 거대 의료기기회사의 브랜드 가치에 밀려 설 땅이 부족하다는 점일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정부의 역할을 주목하고 있다. 과거 스크린 쿼터의 어려움을 돌파하고 세계적인 수준으로 우뚝 선 영화산업과 장치산업을 육성하면서 그 부가가치로 우뚝 선 국내 자동차 산업 분야에서 정부는 큰 매개자 역할을 수행했다.

저는 의료기기 분야의 국내 기술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관련 전자, 기계 분야 기술력은 짐작하건대 세계적인 수준에 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구슬을 꿰어야 함에도 그 구슬이 각자 굴러가고 있으니 세계 수준을 못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3년마다 진행되는 상급종합병원 지정평가 기준에 ‘국산의료기기 사용 비율’을 포함시킬 수만 있다면 제 생각에 몇 년 안에 큰 도약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상급종합병원에서 일정 비율 국산의료기기가 차지하게 되면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세계시장으로 뛰어나가는 것은 시간문제 아닐까?

상황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특히 부존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은 미래를 내다보며 전략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가야 한다. 1970년대 초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제 세계 10대 무역대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해내지 않았는가?

필자는 국산 의료기기산업의 발전을 위해 기술력의 확보 측면과 더불어 정부의 정책 의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연구자나 개발자의 경우 역시 보다 섬세하게 국민건강보험의 등재 절차 등 필요한 제도적 여건을 기술개발 초기 단계부터 숙지하고 적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보건의료분야는 다른 분야와는 다르게 공적 급여-건강보험제도에 등재되어야 그 시장이 크게 열리는 특성이 있다. 일부는 비급여로도 시장에 유통되기도 하나 종합병원급 이상 대형병원의 구매자 입장에서는 공적 급여에 등재된 후라야 구매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이러한 공적 급여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우선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안전성·유효성 검사에 합격하고 경우에 따라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치료재료 전문평가위원회 등을 통해 건강보험 적용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각각의 상황이 대부분 영세한 의료기기 업체 입장에서는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기술개발 단계 초기부터 이러한 단계를 넘어서려는 목적의식 하에 필요한 자료 등을 꼼꼼하게 준비해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관련 프로세스를 혁신하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건강보험 등재 과정의 보수성에 비추어 각각의 단계는 개발단계에서부터 철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단의 출발은 관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그 자체로 정부 정책 의지의 표현이다. 다시 오지 못할 기회가 의료기기산업 분야에 열려 있는 것이다. Kingdon의 ‘정책의 창’ 이론에 따르면 창문이 열릴 때를 대비해 세밀하게 준비된 정책이 창문 밖으로 던져질 때 비로소 정책은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현재 상황은 아직 불투명하지만, 모두의 지혜를 모아 의료기기산업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히는 밝은 등불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